상단여백
HOME 뉴스 피플
프로레슬링, ‘국민스포츠 부활’을 꿈꾼다[인터뷰] 백종호 김일기념체육관 관장

‘김일기념사업회’ 내년 발족 “프로레슬링 부활 모태 될 것”

50대 이상이면 기억할 것이다. 박치기로 상대를 눕히던 프로레슬러 김일. 마지막 ‘외다리 박치기’ 한 방으로 상대를 눕히는 광경을 보고 울고 웃으며 배고픔을 잊던 시절이었다. 프로레슬링의 황금기였던 6~70년대였다.

80년대 들어 프로레슬링 인기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마의 피를 철철 흘려도 김일의 가슴을 채우던 환호와 함성은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프로레슬링의 부활을 꿈꾸던 김일은 끝내 그 꿈을 보지 못하고 2006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금 고향인 고흥군 금산면 생가 담 옆에 봉분 없는 평장으로 누워 있다.

김일 생가 건너편에는 프로레슬링의 ‘살아 있는 전설’을 기념하는 김일체육관이 있다. 그 곳에서 스승의 못다 이룬 꿈을 지키는 ‘외로운 늑대’ 백종호(67). 김일체육관 관장이다.

 

   
▲ 김일기념체육관

소심하고 무능력한 은행원이 프로레슬링을 배우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코믹하게 그린 영화 ‘반칙왕’. 그는 송강호가 주인공인 그 영화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그는 실제 은행원이었고 30여 년을 은행원과 프로레슬러의 길을 오갔다.

2년 전부터 김일체육관 관장을 맡고 있는 그는 지금 한국 프로레슬링의 부활을 꿈꾸며 그 꿈의 실현만이 스승 김일 선수와 영원히 함께 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김일체육관에서 백종호 관장을 만났다.

 

   
▲ 백종호 관장

-레스링과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40여 년 전 한일은행(현 우리은행)에 갓 입사했을 때였다. 김일 선수가 체육관 건립기금 2억원을 어떤 은행에 예치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신출나기 은행원에게 예금유치는 큰 실적으로 평가되던 시절이었다. 김일 선수의 예금을 유치하기로 맘 먹었다. 무작정 김일 선수를 찾아가 “선생님 고향인 고흥 금산이 제 고향입니다”하고 인사를 드렸다.

-처음 만나 예금 유치에 성공했나
벼룩도 낯짝이 있지 어떻게 처음 만나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나? 은행원 신분을 속이고 레슬링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씩 웃으시며 “임마, 그 작은 몸둥이로 어떻게 프로레슬링을 해” 그러면서 내게 박치기를 해버렸다. 바로 정신을 잃었다. 나를 거두어주신 분은 당시 김일 선수 문하생으로 있던 우리 금산 출신 김유식 선배였다. 이후 김 선배에게서 몸불리기와 기술 연마 등 훈련을 받았다. 그렇게 몸을 만들고 나서 1년이 지나 데뷔전을 치르고 김일 선생님께 내 은행원 신분을 고백했다. 선생님이 내게 처음 박치기를 할 때처럼 웃으셨다.
“그래, 그 돈 느그 은행으로 가져가라.”
데뷔전에는 졌고 예금 유치에는 성공했다.

-선수 시절 드롭킥이 장기로 알려져 있다. 어떤 기술인가.
원래 럭비 용어다. 손으로 공을 땅에 떨어뜨렸다가 공이 다시 튀어 오르는 순간에 차는 것을 말한다. 프로레슬링에서는 팔꿈치로 바닥을 짚고 두 발로 상대의 가슴이나 뺨을 차는 것이다. 몸무게가 있는 선수들에게 상당히 힘든 기술이다.

-반칙왕이라고 별명이 붙은 이유는?
내 원래 링네임은 ‘외로운 늑대’다. 영화 반칙왕의 실제 모델이라고 언론에서 그렇게 별명을 붙여버렸다. 언론이 붙여준 ‘반칙왕’이라는 별명도 싫지는 않다. 레슬링에서는 반칙도 기술이다. 규칙 내에서 반칙은 경기에 재미를 더한다. 관객은 그 반칙을 보며 웃고 즐긴다. 그런데 반칙은 승부를 결정짓는 요소가 아니다.

-자신의 전적은?
73년 데뷔전 이후 2004년 은퇴 경기 전까지 111전 55승56패였다. 2004년 장충체육관에서 은퇴경기를 했다. 마지막 경기에 이겨 승률 50%를 기록하고 싶었다.

 

   
▲ 2004년 은퇴 경기 전의 백종호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당시 백종호의 은퇴 경기를 보도한 신문 기사를 보자.

“8대2 가르마에 다소 적어진 앞 머리숱, 운동복 위로 삐져나온 뱃살. 세월은 겉모습을 바꿔놨지만 백씨의 ‘드롭킥’은 예전 그대로였다. 관중들은 땀 범벅이 된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고, 그 동안 한 번도 경기장을 찾지 않았던 백씨 가족도 마음을 담은 응원을 보냈다. 백씨는 고별전을 위해 5개월간 특별훈련을 했지만 상대 선수 남태령에게 패했다. 3년 전까지 쉼없이 출전한 공식 경기에서 111전 55승 56패를 기록한 그는 이번 고별전에서 승리해 승률 50%를 채우겠다는 다부진 꿈을 품었지만 아쉽게 무산됐다.”

그 날 경기를 관람했던 은행원 기록도 남았다

“팬티 허리끈 위로 넘쳐나는 뒷허리, 살이 갈라진 흔적이 역력한 뒷 허벅지를 가진 백종호 지점장님은 존나게 얻어터지다가 10분을 못버티고 패배했다.
레슬링 동호회 전원이 이를 악물고 "지점장! 지점장! 지점장! ToT" 을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아나운서가 경기 후에 즐겁게 춤을 추다 그대로 멈춰있는 지점장을 보더니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에에, 우리 지점장님이 밤낮없이 국가 경제를 위해 애쓰다보니 훈련이 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 김일 선수의 박치기 모습을 재연하고 있는 백 관장

-승률 50%를 달성하지 못했다. 아쉽지 않은가?
그 때까지 111전 55승 56패였다. 은퇴경기에서 이겨 승패 동률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졌다. 나는 쉰 여섯 살이었고 상대 선수는 스무 살 이상 젊은 남태령이었다. 그래도 지고 나니 섭섭했지만 얼마 후 생각해보니 정말 후련하고 좋았다. 인생은 이기는 것보다 약간 지면서 사는 자세가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상대를 배려하며 살라는 가르침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112전 55승 57패로 2패가 더 많은 내 통산 전적은 나를 가르치는 지침이 되었다

-프로레슬링은 짜고 하는 연극이라고 하는데...
(이 질문에 그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맞다. 짜고 한다. 프로레슬링에는 2백여 가지의 기술이 있다. 아주 위험한 기술도 있다. 그래서 공격과 방어에서 부상을 최소화하는 규칙이 있다. 그 규칙을 지키며 경기를 하는 데도 많은 부상이 따른다. 일본의 한 선수는 경기 중 부상으로 죽음을 맞은 사례도 있다. 죽음도 짜고 하고 연극인가? 프로레슬링은 가짜 연기가 아니라 일정한 규칙을 지키며 하는 가장 인간적인 스포츠다. 복싱이나 격투기처럼 상대를 비인간적으로 제압하지 않는다. 상대를 기술로 제압하고 지치면 어깨를 눌러 원 투 쓰리 셀 때까지 못 일어나면 끝난다.
김일 선수 은퇴식 때 어떤 기자가 “프로레슬링은 연극 각본처럼 짜고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선생님은 웃으시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허허, 우리 인생이 연극 같은 게 아니겠소.”

-육칠십년대에 프로레슬링이 아주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프로레슬링은 6·25 전쟁 이후에 부산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이후 김일 선수의 등장으로 한국 프로레슬링이 인기 절정에 오르게 됐다. 특히 김일 선수가 박치기 한 방으로 일본 선수를 쓰러뜨릴 땐 온 국민이 환호했다. 일제 식민지와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얼룩진 아픈 역사를 몸으로 겪은 우리 국민의 민족적인 한과 아픔을 달래주는 진정한 의미의 민족 스포츠 역할을 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프로레슬링이 우리나라에서 진정한 스포츠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계기는 민족의 스포츠 영웅인 김일 선수의 등장으로 인해서였다. 당시 미국, 일본에서 활동을 했던 김일 선수는 입국 후, 해외 및 국내 프로모터의 역할과 현역선수를 겸하게 되었다. 이왕표, 김도유, 노지심 등 일대를 풍미했던 선수들을 키워낸 분도 김일 선수였다.

 

   
▲ 백 관장에게 처음 프로레슬링 기술을 지도했던 김유식 선배와 함께 김일체육관에서.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사라진 이유는?
80년대 이후 야구, 농구, 배구, 축구 등 프로스포츠가 시작됐다. 프로 스포츠가 다양해지면서 프로레슬링은 위축됐다. 프로레슬링이 국민의 스포츠에 대한 다양한 욕구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면도 크다. 프로레슬링 해서 먹고 살기 힘드니 선수층도 엷어졌다.

-김일 선수 이후 레슬링 선수들은 어떻게 지내나?
모두 어렵다. 거의 레슬링을 접고 다른 생업 활동을 하고 있다. 김일 선생님의 후계자인 이왕표 선수는 현재 담도암 투병 중이다. 최근 수술 전 장기 기증 유언까지 미리 한 언론 보도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얼마 전 만나고 왔다.

-프로레슬링 관련 계획하고 있는 일은?
김일기념사업회를 내년 상반기에 발족시키려 한다. 선후배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일기념사업회를 통해 프로레슬링 관련 연례 행사도 계획하고 있다. 이 기념사업회는 한국 프로레슬링 부활의 모태가 될 것이다.

-옛날의 인기를 회복할 수 있을까?
프로레슬링에 대한 재인식을 위해 레슬링계의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프로레슬링이 얼마나 재미있고 훌륭한 스포츠인지 다시 보여주게 될 것이다. 어린 학생들에게도 교육적인 효과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운동은 온몸을 던진다. 도전과 끈기를 배우는 과정이다. 그냥 취미 운동으로 해도 좋다. 무기력한 청소년들에게 인생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용기와 자신감을 주는 최적의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승부가 중요하지 않다. 져도 기분 나쁘지 않다. 상대를 이겨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승패를 함께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프로레슬링의 정신이다. 서로 안고 체온을 나누며 하는 경기다. 네가 없이 내가 없고 내가 없이 네가 없다는, 세상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는, 프로레슬링은 함께 살아가는 공부다.

 

   
▲ 생가 옆의 김일 선수 묘소. 봉분 없는 평장이다.

-이노키 선수가 최근 북한을 방문해 숙청되기 직전 장성택을 만났다는 뉴스가 있었다.
역도산이 북한 출신이다. 김일 선생님과 이노키 선수는 역도산 문하생이었다. 이노키는 90년대에 스승 역도산의 고향 평양에 가서 큰 행사를 치른 적도 있다. 최근 다시 평양에 가서 장성택을 만난 것은 역도산의 사위가 우리나라로 치면 체육부장관을 오래 지낸 것과 관련이 있다. 이노키는 김일 선수를 단순한 동료 이상으로 존경하고 있다. 50대 이상의 우리 국민들은 김일 선수와 이노키의 대결에 환호했던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오래 전 그는 김일 선수의 고향인 고흥에도 다녀갔다. 김일 기념사업을 한다고 하면 언제든지 달려올 것이다. 이노키는 일본 참의원을 지냈다. 그와 함께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중요한 스포츠 외교다.

-김일체육관이 건물만 있고 내용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고흥은 김일 선수의 고향이다. 또 김도유 선수를 비롯한 많은 선수가 고흥 금산 출신이다. 고흥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프로레슬링의 메카다. 김일 선수는 돌아가실 때까지 프로레슬링의 국민스포츠 부활을 꿈꿨다.
고흥군에서 김일기념체육관을 지은 것은 아주 중요한 출발이었다. 2년 전 이 체육관이 건립되기까지는 김일 선수의 유지를 우리 고흥에서 시작하겠다는 박병종 군수의 굳은 의지가 있어 가능했다고 본다. 그 내용을 채우는 일은 고흥군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

내가 은행원 시절 김일 선수로부터 유치했던 예금은 박정희 대통령의 격려금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김일 선수를 청와대로 불러 격려하며 소원을 물었다. 김일 선수는 고향 금산에 전깃불을 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고 그렇게 해서 섬이었던 거금도(금산면)에 전기가 들어왔다는 것은 고흥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 때 우리 고향의 전깃불처럼 프로레슬링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기업의 지원이 필요하다.

선대원 ㆍ류용석  ghnews21@gmail.com

<저작권자 © 영호남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선대원 ㆍ류용석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1
전체보기
  • 고흥인 2013-12-13 09:29:42

    자랑스런 고흥인 김일선수 그뜻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모두 관심을 갖고 응원 합시다 김일선수 화이팅!! 백종호관장 화이팅!!!   삭제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