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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약이 시골을 망가뜨린다[시골에서 책읽기]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가와구치 요시카즈·쓰지 신이치 대담
 임경택 옮김
 눌민 펴냄, 2015.8.25. 14000원
 
 
어릴 적부터 늘 바람을 생각했습니다. 하루라도 바람을 잊지 않으며 살았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코가 나빠서 이비인후과를 늘 들락거렸고, 철이 들 만한 나이가 되어도, 제금을 나고 아이를 낳은 뒤에도, 코는 늘 나빠서 숨을 쉬기가 벅찼습니다. 아무래도 코가 나빴기 때문에 바람을 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도 할 텐데, 숨을 쉴 만한 곳이 아니면 있기 어려웠어요. 그리고, 숨쉬기란 무엇인가를 놓고 늘 생각했어요. 숨을 쉴 때마다 숨쉬기를 생각하며 살았어요. 코가 나쁘니 숨을 한 번 쉬는 일조차 늘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보니, 창문을 꼭꼭 닫은 곳에 있는 일이란 언제나 죽음하고 같았습니다. 바람이 드나들지 않는 곳에 있는 일이란 목을 옥죄는 일하고 같았어요. 한겨울에도 창문을 열어야 비로소 숨이 트였고, 날이 아무리 추워도 옷을 얇거나 가볍게 입으면서 바람을 느끼려고 했습니다.
 
농촌은 환금 작물을 대규모로 단일 재배하는 공장으로 바뀌, 거기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의 다수도 기계나 화학비료나 농약을 비롯한 공업 자재를 소비하는 측이 되어 많은 부채를 지고 거대한 사회 시스템에 의존도를 높여 가고 있을 뿐이다. (11쪽)
 
농가에서 자랐는데도 농민 자신을 낮게 자리매김해 버리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32쪽)
 
나는 오늘 시골에서 삶을 짓습니다. 시골하고 도시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지내기도 했지만, 아주 시골에서 눌러산 지 다섯 해가 무르익습니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살며 가장 기쁜 일을 꼽자면 바로 바람입니다. 맑으면서 싱그러운 바람이 기쁘고, 언제 어디에서나 푸르면서 파랗게 부는 바람이 반갑습니다. 때때로 농약바람이 불기는 하지만, 농약바람이 불면 농약이 없는 데로 떠나서 지내요. 숨을 쉴 수 있도록 하는 바람이 있는 곳에서 살며 비로소 코가 트이고 몸이 트인다고 할까요.
 
그런데 올해에 부는 바람을 찬찬히 살피니 올해에는 바람이 거의 안 붑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 주에 두어 차례는 바람이 제법 세게 불었는데, 올해에는 한 달에 한 차례조차 센바람이 안 붑니다. 올해에 부는 세다 싶은 바람은 지난해 분 바람에 대면 바람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바람입니다.
 
문득 옛말을 떠올립니다. 예부터 큰바람이 여러 차례 불지 않으면 나락이 제대로 안 익는다고 했어요. 큰바람이 휘몰아쳐서 나락을 흔들어 주어야 볏줄기도 튼튼하고 나락도 알차게 맺는다고 했어요. 큰바람이 휘몰아치면서 풀벌레나 모기도 날려 버리기에, 시골에서는 꼭 큰바람이 불어 주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오늘날 시골에서는 바람을 걱정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옛날과 달리 오늘날 볍씨는 품종개량(유전자조작)을 해서 짜리몽땅합니다. 짜리몽땅하면서 열매를 더 많이 맺도록 하는 ‘품종개량 시킨 볍씨’이기 때문에 바람이 불든 안 불든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 아니라, 바람이 안 불어야 더 잘 된다고까지 합니다.
 
   
 
 
여름에는 소나기가 걷히고 나면 냇가에 넘치는 미꾸라지,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매미, 하늘가재, 나비, 잠자리를 쫓아다녔습니다. (35쪽)
 
현대 예술의 다수는 추악의 극점의 양상을 찾고 있습니다. 미술관에 가면 현대 작가들의 추악한 작품이 많이 진열되어 있는데, 비평가들은 그것들이 “시대를 상징하고 있다.”, “개성이 대단하다.”라고 극구 칭찬하면서 어둠에 빠져버립니다. 작가도 비평가도 예술의 본질을 밝히지 않고 가치를 역전시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50쪽)
 
가와구치 요시카즈 님하고 쓰지 신이치 님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그러모은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눌민,2015)을 읽습니다. 가와구치 요시카즈 님은 일본에서 ‘자연농’을 한 지 마흔 해 남짓 되었다고 합니다. 자연농 한길을 오랫동안 걸어오면서 느끼거나 생각한 이야기를 이 조그마한 책에 살뜰히 풀어냅니다.
 
그러면, 자연농이란 무엇일까요? 자연농이나 유기농 같은 말은 일본에서 지었습니다. 일본에서 나온 농사법입니다. 자연농은 자연 그대로 자라도록 두는 농사입니다. 유기농은 똥오줌을 거름으로 삭혀서 주는 농사입니다. 자연농에서는 거름을 주지 않고 농약이나 비료도 쓰지 않습니다. 유기농은 거름을 쓰는 농사이기에 농약을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도 있습니다. 농약을 안 쓰는 농사는 ‘무농약’이라 하고, 무농약이라고 하더라도 거름을 안 쓸 수 있고, 화학비료를 쓸 수 있습니다. 이밖에 ‘저농약’은 농약을 적게 쓴다는 농사이고, ‘친환경’은 ‘친환경 농약’하고 ‘친환경 비료’를 쓴다는 농사입니다. ‘관행농’은 농약과 비료를 마음껏 쓸 뿐 아니라, 비닐과 기계도 마음껏 쓰는 농사입니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자연농’일 때에는 거름도 비료도 농약도 비닐도 안 쓰지만, 농기계까지 안 씁니다. 오직 사람 손으로만 짓는 농사가 바로 자연농입니다. 그래서 유기농도 ‘무농약 유기농’일 때에 비로소 농약이 없이 똥오줌 거름을 쓰는 농사가 되는데, 똥오줌 거름도 ‘관행 축사’에서 화학사료를 먹은 소똥이나 돼지똥을 쓰는 유기농이 있고, ‘친환경 축사’에서 덜 나쁜 화학사료를 먹거나 볏짚(관행논에서 벼를 털고 남은 볏짚)을 먹인 소와 돼지가 눈 똥을 쓰는 유기농이 있습니다. 가게에서 파는 유기농 곡식이나 열매 가운데에서 ‘사람이 눈 똥오줌’만 쓰는 유기농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 똥오줌만으로는 드넓은 논밭에 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사히 신문에서 아리요시 사와코가 〈복합오염〉이라는 연재를 시작했습니다(1974년). 그것을 읽고 농약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무서워서 도중에 읽기를 그만뒀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사용하던 기계농업, 화학농업을 완전히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 자연농으로 쌀도 채소도 재배할 수 있게 되기까지 10년이 걸렸으므로 그 사이에는 수입이 전혀 없이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63∼64쪽)
 
   
 
 
지난날에는 누구나 시골사람이었으니 누구나 시골일을 다 알았습니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도시사람이기에 누구나 시골일을 다 모릅니다. ‘자연농·유기농·친환경·관행농’ 같은 말조차 모르는 시골사람이 많고, 도시에서 생협 회원이면서 시골일을 스스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농사법이 저마다 어떻게 다른가를 찬찬히 아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을 함께 빚은 일본 농사꾼 가와구치 요시카즈 님은 처음부터 자연농을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따라서 농약을 신나게 치는 농사법을 물려받았다고 해요. 다만, 농약을 신나게 치는 농사법을 물려받기는 했어도, 농약을 칠 때하고 농약을 치고 난 뒤에 무척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때에는 왜 힘든지 몰랐다지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고요. 그러던 어느 날 〈복합오염〉이라고 하는 소설을 신문에서 읽었고, 이 소설에 나오는 ‘농약 피해 이야기’가 소름이 돋도록 무서워서 신문에 실리는 소설을 더 읽지 못했다고 하는데, 신문에 실린 소설을 읽고 나서 곧바로 ‘농약 한 방울도 안 쓰기’를 하자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나이가 들어 혼인을 한 뒤에도 한동안 농약을 썼지만, 농약을 쓰고 난 뒤에는 언제나 앓았다고 해요. 〈복합오염〉이라는 소설을 읽기 앞서까지는 왜 앓는지 몰랐지만, 〈복합오염〉이라는 소설을 읽은 뒤에는 왜 앓는지 알았기에, 스스로 몸을 지키고, 가와구치 요시카즈 님 혼자만이 아니라 곁님과 아이들을 생각해서 ‘모두 튼튼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을 열려고 농약을 버렸다고 합니다.
 
유년기에서 소년기까지는 다른 풀에 깔리지 않도록 손을 빌려줍니다. 모든 작물은 개개의 성질이 있으므로 그 성질에 따라 바람직한 환경으로 저절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73쪽)
 
이 자연계는 논 언저리에 있는 양분만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나 물이나 공기 등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살아가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76쪽)
 
한국 사회에서는 농약이 어떤 피해를 입히는지 알려주는 학교나 기관이 아직 없습니다. 시골에서 ‘농약 마시고 음독자살을 한다’는 신문글은 곧잘 나오지만, 농약이 어떠한 화학약품인가를 제대로 밝히거나 알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시골사람이 왜 농약을 마시면서 ‘스스로 죽으려’ 하는가를 제대로 깨달으리라 봅니다. 자, 생각해 보셔요. 농약을 마시면 죽습니다. 그렇지요? 빚 때문에 죽고 싶어서 농약을 마시는 시골사람이 있습니다만, 농약을 마시니 죽어요.
 
마시면 죽는 농약을 뿌리면 어떻게 될까요? 농약을 뿌리는 시골사람은 농약을 뿌리면서 농약바람을 함께 마십니다. 농약이 얼굴이며 손발이며 몸이며 옷에 잔뜩 묻습니다. 온몸을 비닐옷으로 꽁꽁 싸매도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방독면을 입에 두르지 않고서야 농약을 마시기 마련입니다. 농약을 마시니 농약이 바로 몸속으로 스며들어요. 살갗으로뿐 아니라 코와 입을 거쳐서 온몸 구석구석 농약이 배어듭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방독면을 하든 비닐옷을 꽁꽁 두르든, ‘마시면 죽는 농약’을 논밭에 칩니다. 이 대목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시면 죽는 농약인데 논밭에 친단 말이에요. 그러니, 시골사람은 농약을 치면서 늘 앓을 수밖에 없습니다. 농약을 치면 칠수록 관절이며 호흡기이며 온갖 곳이 다 아프기 마련입니다. ‘늙어서 아프다’기보다, ‘힘든 일을 해서 아프다’기보다, 바로 농약을 치기 때문에 아픕니다.
 
다양한 풀들과 작은 동물이 동시에 살아야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많은 것들이 반년 안에 죽고 그 시체가 다음 생명의 무대가 되는 것입니다. 봄에 싹을 낸 풀이 자라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고 어미가 죽으면, 지금까지 없었던 다른 성분을 만들어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79쪽)
 
수입은 없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예술적인 시간을 보냈고, 올바른 것,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나날이었으며 매일 행복했습니다. 타인의 눈이나 언동이나 평가에 좌우되지 않았으니까요. (87쪽)
 
   
 
 
도시사람도 생각해야 합니다. 마시면 죽는 농약을 시골에서 뿌립니다. 농협을 거쳐서 파는 모든 곡식과 열매는 ‘농협에서 시골사람한테 내다 판 농약을 뿌려서 얻은’ 곡식과 열매입니다. 생협이 아닌 모든 백화점과 가게에 놓인 곡식과 열매는 농약을 아주 신나게 뿌려서 거둔 곡식과 열매입니다.
 
미국에서는 《침묵의 봄》이라는 책이 나왔다면, 일본에서는 《복합오염》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아무런 책이 안 나옵니다. 농약이 사람을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죽이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책이 한국에서만큼은 아직 제대로 안 나옵니다.
 
왜 그러할까요? 한국에서는 왜 농약 이야기를 안 다루거나 못 다룰까요? 사람들이 ‘참된 지식’을 얻으면 나라가 뒤집힐 테니까요. 농약으로 장사하는 농협과 정부기관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거나 크게 뒤흔들릴 수 있을 테니까요. ‘먹으면 죽는 농약’을 논밭에 뿌리면 괜찮을까요? 사람은 죽이지만 풀은 안 죽이는 농약일까요?
 
포도밭이나 능금밭에 농약을 얼마나 많이 뿌리는지 사람들은 얼마나 아는가요? 배밭이나 딸기밭에도 농약을 얼마나 많이 치는지 사람들은 얼마나 아는가요? ‘가장 값싼 쌀’은 농약을 가장 많이 친 쌀입니다. 농약을 덜 칠수록 쌀은 값이 비싸다고 하고, 농약을 하나도 안 치고 유기농으로 지은 쌀은 값이 더 비싸다고 하며, 유기농조차 아닌 자연농으로 지은 쌀은 값이 가장 비싸다고 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농약도 비료도, 또 ‘유기질’이라고 하는 거름조차 사람 몸에는 ‘안 좋은’ 줄 도시 소비자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는 아직 잘 몰라도 ‘몸으로는 먼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골에서는 관행농을 버리고 적어도 유기농으로 간다면, 나아가 자연농으로 간다면 쌀도 푸성귀도 열매도 ‘가장 비싸게’ 팔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시골에서는 관행농을 못 버리고 안 버릴 뿐 아니라, 유기농이나 자연농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연의 보살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동안에는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114쪽)
 
한 번 갈게 되면 시간의 흐름과 함께 흙이 딱딱해져서 작물의 뿌리에 공기가 닿지 않게 되고 성장이 나빠집니다. 또는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심는 작업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계속 갈아야 합니다. 갈지 않으면 흙은 딱딱해지지 않고 계속 말랑말랑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118쪽)
 
한국 사회에서 농협이라고 하는 곳은 농사꾼 삶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농협이라고 하는 곳은 ‘더 많이 이익을 내려고 하는 수익기관’입니다. 그래서 농협은 시골사람한테 장사를 합니다. 첫째, 씨앗 장사를 합니다. 품종개량(유전자조작)을 한 씨앗을 팔아요. 농협에서 시골사람한테 파는 ‘품종개량 씨앗’은 이 씨앗을 심어서 거둔 ‘농산물’에서 나온 씨앗을 이듬해에 심으면 싹조차 트지 않도록 유전자를 건드렸습니다. 그리고, 농협은 농협에서 내다 파는 ‘품종개량 씨앗’으로 거둔 농산물이 아니라면 수매를 하지 않습니다.
 
둘째, 농협은 농약 장사를 합니다. 우유회사가 축산 농가한테서 우유를 살 적에 ‘우유회사에서 만든 사료’를 소한테 먹이도록 팔듯이, 농협도 시골사람한테 ‘품종개량 씨앗’을 팔면서 ‘농협 농약’을 팝니다. 지자체에서 꾀하는 ‘친환경’은 친환경 농약을 쓰도록 하는데, 친환경 농약도 언제나 농협에서 파는 친환경 농약만 사서 뿌리도록 얽어매지요.
 
셋째, 농협은 농기계 장사를 합니다. 오늘날 시골은 경지정지를 해 놓아서 기계를 다루기 좋도록 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씨앗과 농약(여기에 비료까지)과 농기계, 이밖에 온갖 다른 것들(비닐이라든지)을 시골사람한테 몽땅 팔아서 돈을 버는 농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골사람이 거둔 농산물을 오직 농협에서 ‘전매’를 하는 얼거리를 짰으니, 농협은 가만히 앉아서 ‘유통’ 한 가지만으로도 언제나 크게 목돈을 거머쥡니다.
 
춘하추동 꽃이 피고 나비가 춤추는 논밭에서, 부드럽고 맑게 퍼져가는 하늘 아래 바람이 스치고 물결이 빛나는 해변에서, 붉은색 노란색 녹색으로 색깔을 바꿔 가며 물드는 수풀과 숲에서, 생명 있는 것으로서 대답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즐겁고도 기쁜 나날을 보내고 싶은 것입니다. 이 별, 생명들이 빛나는 화원, 우주의 낙원에 태어났으니까요. (133쪽)
 
자연농을 하는 까닭은 자연농이어야 비로소 흙이 살기 때문입니다. 흙이 살아야 농사를 짓는 시골사람이 스스로 튼튼하고 스스로 아름다운 곡식과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시골사람부터 스스로 튼튼해야 ‘시골사람이 지어서 얻은 곡식과 열매’를 도시 소비자한테 기쁘게 내다 팔 수 있습니다. 제대로 지어서 거둔 제대로 된 곡식과 열매이니 ‘제대로 된 값(제값)’을 받을 수 있어요.
 
해충과 익충을 구별하는 것은 전체인 자연계의 존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56쪽)
 
시골에 살고 있어도 우주를 얻지 못하고 자연을 얻지 못하면 진정한 평안과 평화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또한 도회지의 소비자와 시골의 생산자는 일체의 존재입니다. (214쪽)
 
   
 
 
예부터 시골사람은 누구나 풀을 아꼈습니다. 예부터 시골에는 ‘잡초’가 없었습니다. 도시가 생기고 도시 문명이 퍼지면서 ‘잡초’라고 하는 뜬금없는 말이 불쑥 나왔습니다.
 
예부터 시골에서는 언제나 그냥 ‘풀’입니다. 소나 염소나 토끼가 풀을 뜯습니다. 소나 염소나 토끼는 풀을 대단히 잘 먹습니다. 집짐승뿐 아니라 숲짐승도 풀을 뜯어요. 어디에나 풀이 흔하니 모두 풀을 먹습니다. 숲짐승이 구태여 ‘사람 마을’까지 내려와서 밭을 들쑤실 까닭이 없습니다.
 
오늘날 시골에서 숲짐승이 왜 사람 마을로 몰래 내려와서 밭을 들쑤실까요? 숲에 먹을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숲마다 송전탑을 때려박고 고속도로와 고속철도 때문에 구멍을 뚫을 뿐 아니라 곳곳에 공장과 골프장과 관광단지와 대형 발전소 따위입니다. 숲짐승은 참말 숲에서 살 길이 없어요. 풀을 맛나게 먹던 숲짐승이 풀이 아니라 ‘사람 마을 밭’에 심은 것을 노릴 수밖에 없는 얼거리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면서 농약·화학비료·비닐·농기계를 쓰게 시키고 도시 개발을 일으키면서, 시골도 도시도 숲도 모두 망가지는 길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풀이 자라지 못하는 시골에서 풀내음도 없지만, 사람도 숲짐승도 모두 고단합니다. 시골에서 시골사람이 스스로 고단하니 도시사람도 소비자로서 고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화학물질에 의한 토지 오염을 과학으로 해결하려고 하여 새로운 화학물질을 투입해 정화하려고 하는데, 결코 정화가 되지 않을 뿐더러 반드시 새로운 문제를 초래합니다. 내버려 두면 되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생명의 작용에 의해 잘못됨 없이 정화가 됩니다. (244쪽)
 
시골이 무너지면 도시가 함께 무너집니다. 도시가 무너진대서 시골이 무너질 일은 없지만, 시골이 무너지만 도시는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사람이 먹을 온갖 곡식이랑 푸성귀랑 열매를 짓는 시골이 무너져서 사라지면 참말 도시는 어떻게 될까요? 은행이 없어도 한국 사회는 멀쩡할 수 있지만, 시골이 없으면 한국 사회는 끝장입니다. 법원이나 청와대가 없어도 한국 사회는 튼튼할 수 있지만, 시골이 없으면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끝장이에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농사꾼이 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수많은 젊은이가 스스로 땅을 일구면서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북돋아야 합니다. 도시 일자리를 늘리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친들 실업자나 일자리 문제는 풀 수 없습니다. 시골이 살기 아름다운 터전이 되도록 농약·비료·비닐·농기계를 몽땅 밀어내면서, 이 모든 시골일을 사람 스스로 가꾸고 돌보는 길을 새롭게 찾을 노릇입니다. 먼저 자급자족을 이루는 시골살이를 젊은이 누구나 깨닫도록 이끌면서, 자급자족 다음에는 ‘넉넉히 남는 곡식·푸성귀·열매’를 도시에 ‘착한 유통’으로 보급하는 길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된 관행농’이 아니라 ‘즐거운 자연농’을 누리는 길을 이제부터 새롭게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베어낸 풀을 쌓아두면 그 아래는 폭신폭신해집니다. 또한 논두렁길은 풀뿌리 때문에 무너지지 않을 뿐 아니라 딱딱하지도 않습니다. 풀을 없애버리면 풀뿌리가 없어지기 때문에 무너져버립니다. 땅을 갈지 않으면 흙은 부드러워진 곳과 만나게 되므로 ‘아, 역시 그랬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71쪽)
 
바람을 읽으면 날씨를 읽습니다. 바람을 읽으면 흙을 읽습니다. 바람을 읽으면 풀하고 나무를 읽습니다. 바람을 읽으면 비하고 눈을 읽습니다. 바람을 읽으면 바다를 읽습니다. 바람을 읽으면 풀벌레랑 풀짐승을 읽습니다. 바람을 읽으면서 시골을 읽고 말을 읽으며 생각을 읽습니다. 바람을 읽기에 비로소 사람과 삶과 사랑을 읽습니다.
 
모든 사람이 대단한 자연농을 할 수 있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제 땅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제 텃밭을 마련해서 지을 수 있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제 보금자리에서 마당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넓은 평수 아파트에서 넓은 마루가 아니라, 그리 넓지 않은 평수인 아파트라 하더라도 ‘우리 보금자리 마당과 텃밭’이 있어야 합니다.
 
손수 심어서 기른 푸성귀를 손수 거두어서 밥을 차려서 먹으면 참으로 맛있습니다. 누구나 이를 몸소 겪으면 그야말로 몸과 마음으로 아주 잘 압니다. 우리는 이 나라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손수 짓는 삶맛’을 알도록 이끌어야 하고, 이 나라 젊은이가 젊을 적에 ‘손수 짓는 삶노래’를 깨닫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자연농’을 배우거나 아는 일은, 바로 도시사람과 시골사람 모두 스스로 ‘삶짓기’를 하는 실마리를 푸는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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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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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지리 2015-09-30 15:38:00

    글을 쓰기 위한 잡글에 불과한 내용 같습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책상에 앉아 펜으로 주장하는 것과 현실적 농사법과는
    천지차이지요.
    글 내용처럼 살고 싶으면 부시맨 처럼 살아야 합니다.
    아니면 현대문명이 단절된 무인도에 들어가서 홀로 살던가..
    아무리 읽어도 글쓰기 놀음 주장 같네요.
    너털 웃음은 어떻게 표현 하지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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