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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광주여…" DJ 통곡하던 5·18 묘역에 묻힌 김홍일
1987년 9월8일 광주 북구 망월묘역을 찾은 김대중 당시 통일민주당 고문이 80년 5·18민중항쟁 희생자 유가족들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제공)2019.4.23/뉴스1 © News1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전원 기자,한산 기자 = "내가 대신 죽었어야 하는데, 여러분들이 나를 대신해 죽었어요."

1987년 9월8일. 광주 망월묘역을 찾은 김대중 당시 통일민주당 고문은 5·18유가족과 부상자들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80년 5월 신군부의 총칼에 무참히 쓰러져간 광주 영령들의 유가족 앞에서 김대중은 한스러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이희호 여사는 평전에서 "'계엄군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고 외치다가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보니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김대중의 광주 방문은 1971년 이후 16년 만, 80년 5·18민중항쟁 이후 7년 만이었다. 그동안 김대중은 납치사건과 가택연금, 구속 등으로 대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87년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사면복권돼 활동의 자유를 얻으면서 방문할 수 있었다. 김대중의 망월묘역 방문에 시민 수만명이 망월동을 메웠다.

이희호 여사는 "광주항쟁 때 목숨을 잃은 분들을 참배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망월묘역 참배 배경을 설명했다.

 

 

 

 

 

 

1987년 9월8일 당시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광주 북구 망월동 5·18구묘역을 방문한 모습.(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홈페이지 캡처) 2019.4.23/뉴스1 © News1

김대중은 이희호 여사와 함께 분향하고 묵념한 뒤 추도사를 낭독했다.

"광주! 무등산! 망월동! 감옥에서, 이국땅에서, 그리고 서울의 하늘 아래서 얼마나 나의 피눈물을 짜내고 떨리게 한 이름들이었던가! 그토록 그립고 그토록 외경스럽던 광주와 무등산과 망월동에 오니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안도감과 준엄한 심판자 앞에 선 것 같은 두려움을 아울러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추도사를 읽는 중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김대중의 눈물에 망월동에 모인 시민들도 함께 울었다.

"그날, 금남로에 타오르던 민족의 함성은 국민이 참다운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역사의 결연한 자기주장이었습니다. 20만 동학군의 죽창이 눈사태처럼 무너진 우금치 고갯마루를 지나, 3·1절의 함성과 6·10만세의 함성, 광주 애국학생의 불타는 외침이 산하에 메아리치던 모진 식민의 세월을 넘어서, 억압과 불의에 항거하여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웠던 4·19와 부마의거의 숭고한 정신으로 이어져 내려온, 민족·민주·민중의 천지를 뒤흔든 함성이었습니다."

그는 추도사를 통해 죽은 자들을 거듭 불렀다.

"광주의 영령들이시여! 여러분은 죽어서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의거는 일월같이 빛나고, 여러분이 흘린 피는 역사와 더불어 영원할 것입니다."

광주가 민주주의 성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광주는 민주주의의 본고장이 될 것이며 무등산은 민주와 통일을 밝히는 민족의 영봉이 될 것입니다. 광주 영령 여러분이 잠든 망월동의 이 초라한 공동묘역은 민족의 성지가 될 것입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평화와 자유와 민주의 찬가가 울려 퍼지는 그날, 광주는 구원의 상징으로 영원한 별빛이 되어 민족의 앞길을 인도할 것입니다."

김대중은 오열 속에 추도사를 끝냈고 망월동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오월의 노래'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23일 오후 광주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5·18구묘역)에서 열린 고(故) 김홍일 전 민주당 의원 장례식에서 조문객들이 허토를 하고 있다. 김 전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으로 20일 오후 4시17분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쓰려져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같은 날 오후 5시4분쯤 숨졌다. 2019.4.23/뉴스1 © News1 황희규 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오열하며 5·18 유가족을 끌어안았던 곳. 그곳에 32년 만에 김 전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전 민주당 의원이 안장됐다.

김 전 의원은 군부독재와 맞서 싸우다 당한 극심한 고문 후유증과 숙환으로 지난 20일 영면했다.

김 전 의원은 아버지인 김 전 대통령의 굴곡을 함께했다. 부자를 떠나 떼려야 뗄 수 없는 정치적 동지 관계였다.

경희대 재학 시절인 1971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했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당시 구속돼 공안당국으로부터 극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때의 고문으로 허리와 등, 신경계통을 다쳤고 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에 걸려 보행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록 신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김 전 의원은 2001년 출간한 자서전에서 끔찍한 기억을 회고하며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의 아들은 당사자 입장에선 명예라기보다는 멍에요, 행복 쪽이라기보다는 불행 쪽"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생전 자신 탓에 아들이 병을 얻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김 전 의원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전남 목포·신안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당선돼 국회에 입성했으며 16대, 17대까지 3선 의원을 지냈다

2006년 나라종금 비리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으면서 김 전 의원은 의원직을 잃었다. 이후 대외활동을 접고 병마와 싸웠다.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건 2009년 김 전 대통령 서거 당시다. 김 전 의원은 파킨슨병이 악화해 휠체어를 탄 채 등장했다. 김 전 의원은 대화도 어려운 상태였다. 장례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라는 한 마디를 힘겹게 내뱉은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의원의 망월묘역 안장식이 열린 23일, 김 전 대통령의 차남이자 김 전 의원의 동생인 김홍업 전 의원은 "많은 분들이 형을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감사인사를 했다.

이어 "오전 화장을 하면서 보니까 몸에서 쇳덩어리들이 나왔다. 저런 쇠뭉치를 달고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며 "이제 그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던 육신 다 버리고 하느님 품으로 갔다. 지금 쯤은 아버지하고도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도 든다"고 말했다.

 

 

 

뉴스1 <뉴스커넥트>를 통해 제공받은 컨텐츠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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